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빙그레 이글스 (문단 편집) === 1988년 === 신인드래프트에서 투수 [[송진우(야구)|송진우]]와 [[장정순]], 내야수 [[조양근]]을 지명했다. 하지만 송진우는 1988 서울 올림픽을 위한 국가대표 차출로 이 해에는 나오지 못했다. 개막전 MBC 청룡과의 2연전을 싹쓸이하며 좋은 출발을 했고 그해 4월 17일 해태와의 맞대결에서 [[이동석]]이 최강의 투수 [[선동열]]을 상대로 유승안 포수와 함께[* 1984년 방수원의 첫 노히트노런 때 포수이기도 했다.] 출루 2개가 수비 실책인 '''무사사구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실책만 아니었다면 KBO 최초로 퍼펙트 게임이 가능했다. 한희민은 팀내 최다 이닝인 188이닝을 맡아 16승을 올리며 에이스 역할을 했다. 에이스 이상군은 마무리로 투입되며 3번의 완투와 더불어 135이닝 10승 16세이브를 기록했다. 전해까지 한희민 이상군에 크게 의존했던 마운드는 이동석, 김용남, 김대중이 로테이션을 잘 돌아주고 재일교포 김홍명도 투수 운용에 힘을 보탰다. 장종훈은 생애 첫 두 자릿수 홈런(12개)와 83안타를 치며 생애 첫 '''골든글러브(유격수)'''를 받았다. 장종훈을 포함해 이정훈, 이강돈까지 '''골든글러브(외야수)'''를 수상했다. [[한용덕]]은 연습생 배팅볼 투수 신분을 벗고 정식 선수로 등록되어 루키 시즌을 보냈다. 이들의 활약상과 함께 빙그레는 전기리그 34승 20패 승률 .630으로 선두 해태에 0.5경기차 2위를 차지하며 창단 3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후기리그에선 롯데와 함께 공동 3위(28승1무25패)를 기록했다. 통합승률은 62승1무45패로 해태에 이은 2위였다. 후기리그 2위팀이었던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안방 대전에서 열린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에이스 한희민의 완봉승으로 3:0 승리를 거뒀고, 2차전에서도 이상군의 호투와 고원부, 이강돈의 활약에 힘입어 9:3으로 연승에 성공했다. 대구에서 열린 3차전마저 선발 김대중의 완투승과 장종훈의 쐐기 2점 홈런으로 4:1 승리를 거두며 시리즈 싹쓸이로 창단 첫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창단 첫 한국시리즈의 맞상대는 2연속 우승에 성공했던 해태였는데 해태는 프로야구 최초로 30홈런을 친 김성한이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는 악재가 발생해서 해볼만 한 상대로 여겨졌다. 10월 19일 광주 1차전에서 해태는 에이스 선동열을, 빙그레는 노히트노런 주인공 이동석을 투입했다. 5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막았으나 6회 이순철에게 솔로포, 7회 한용덕이 서정환에 적시타를 내주고 2:0 영봉패를 당했다. 선동열이 8회 손가락 물집으로 마운드를 내려와 문희수가 등판했으나 공략하지 못했다. 다음날 2차전에서는 에이스 한희민을 내세워 이상윤의 해태를 상대했는데 조양근의 히드랍더볼로 5:6 1점차로 잡아야 할 경기를 놓치며 2연패했다. 10월 22일 홈에서 열린 3차전에서는 김대중을 올렸지만 1차전 세이브 투수 문희수에게 꽁꽁 틀어막히며 3:0 완패, 시리즈 전적 3패에 몰렸다. 다음날 4차전에서는 이강돈-유승안의 홈런 등 장단 20안타를 치며 해태에 14:3으로 대승을 거두며 창단 첫 한국시리즈 승리를 거둔다. 잠실로 장소를 옮긴 10월 25일 5차전은 이상군-한희민의 계투 작전으로 5:1 승리로 시리즈 전적은 2승3패가 되었다. 그러나 10월 26일 투수진이 결국 바닥난 빙그레는 이동석에게 팀의 사활을 걸었으나 결국 문희수가 나온 해태에 4:1로 패해 2승4패로 해태에 3연패를 허용하며 준우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단 3년차 한국시리즈 진출로 아직까지 순수 신생팀 중 최단기간 한국시리즈 진출 기록은 유효하다. 이에 가장 근접했던 팀은 2003년 SK와 2016년 NC의 4년차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